사우나 어게인
낡은 목욕탕의 시간은 끝난 줄 알았는데, 가장 디지털적인 세대가 오히려 그 뜨겁고 조용한 공간으로 다시 모여들고 있다. 스마트폰이 멈추고, 취향의 전시가 벗겨지는 곳에서 사우나는 유행이 아니라 회복의 공간이 된다.
한때 동네마다 굴뚝이 있었다. 붉은 벽돌로 만든 높다란 굴뚝 아래에 목욕탕이 있었고, 뜨거운 물을 데우는 연기가 하루 종일 피어올랐다. 그 굴뚝이 보이는 건 그 동네에 사람이 산다는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이었다.
한국 대중목욕탕의 전성기는 2003년이었다. 당시 전국에는 1만 개에 가까운 목욕탕이 성업 중이었고, 4,800명당 1곳꼴로 존재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은 찾는 시설이었고, 목욕탕 주인은 동네 유지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가정에 개인 욕실이 생기고, 샤워 문화가 탕욕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기엔 마지막 직격탄을 맞았다.서울의 목욕탕은 1995년 1,764곳으로 정점에 달한 이후 2025년 기준 510곳만 남았다. 정점 대비 71%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우나에 다시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다.
오래된 사우나의 냄새를 기억하는가. 유황과 염소와 습기가 뒤섞인 그 냄새. 탕 가장자리에 쭈그려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사람, 세신사의 이태리타월이 등 위를 지나갈 때 기묘하게 시원한 느낌, 뿌연 거울에 흐릿하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 공간은 바깥과 시간이 달랐다. 더디고, 무겁고, 묘하게 편안했다. 뭔가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중장년 남성의 시간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사우나는 선택지 밖의 공간이었다. 트렌드가 아니었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낡고 눅눅했다. 그 냄새가, 그 느린 시간이, 그 아저씨들의 공간이 젊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SNS에서 '찜질방'을 검색하면 수만 개의 게시물이 쏟아진다. 팔로워 수만 명의 사우나 전문 계정이 생겼다. 함께 정보를 나누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우나단'도 등장했다. 러닝 크루가 함께 뛰고 함께 탕에 드는 것이 하나의 루틴이 됐고, 주말 밤 술자리 대신 사우나에서 모이는 것이 새로운 사교의 방식이 됐다. 가장 디지털적인 방법으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공간으로 향하는 세대의 풍경이다.
서울은 사람을 끊임없이 설명하게 만드는 도시다. 무엇을 입는지, 어디를 다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취향은 전시가 되고, 일상은 콘텐츠가 되고, 쉬는 시간마저 증명의 대상이 된다. 보여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불안이 도시 전체에 낮게 깔려 있다.
사우나는 그 모든 것을 탈의실에 두고 들어가는 곳이다. 옷이 없으니 브랜드가 없다. 명함이 없으니 직함이 없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팔로워 수도, 좋아요 숫자도 없다. 탕 안에 남는 건 오직 체온과 피로뿐이다. 억대 연봉 직장인도, 편의점 야간 알바생도, 뜨거운 물 앞에서는 그냥 고단한 사람이다. 옷을 벗으면 위계가 녹는다.
그렇게 흐릿해진 경계 위에서 이상한 연대감 같은 것이 생긴다. 서로 이름을 몰라도, 같은 뜨거운 공기를 마시고 함께 땀을 흘리는 것만으로. 술자리보다 덜 떠들썩하고, 카페보다 덜 자의식적인 방식으로 타인 옆에 있을 수 있다. 느슨하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한 말이 있을까. 실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가볍지만, 같은 뜨거움을 견뎠다는 사실만은 남는다.
현대인의 하루는 화면으로 시작해 화면으로 끝난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동하면서도, 심지어 쉬면서도 화면을 본다. 몸은 멈춰 있는데 눈과 손가락과 머리는 멈추지 않는다. '쉬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 도파민의 역치가 높아질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불안으로 채워진다.
사우나는 그 흐름을 물리적으로 차단한다. 뜨거운 김과 습기 앞에서 최신 스마트폰도 그냥 벽돌이다. 알림이 오지 않는다. 답장이 미뤄진다. 숏폼 스크롤이 없다. 억지로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그냥 탈의실 사물함에 넣으면 된다. 선택이 아니라 구조가 연결을 끊어주는 것이다.
연결이 끊기는 시간이 비로소 휴식이 되는 시대에 — 사우나는 물과 증기로 만들어진 비행기 모드다. 뜨거운 탕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찬물에 몸을 담갔다 반복.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없는데, 어딘가 회복이 된다. 효율 없는 그 시간이, 요즘 가장 구하기 어려운 시간처럼 느껴진다.
몸이 달라진 것도 있다. 술 마시는 모임 대신 러닝크루, 등산 모임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한 시대다. 국내 러닝 인구가 1,000만을 넘어선 지금, 함께 뛰고 함께 탕에 드는 건 자연스러운 루틴이 됐다. 뭉친 근육을 풀고 체온을 정리하는 데 온탕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고가의 스포츠 마사지 대신, 만 원짜리 입장권으로 비슷한 회복을 얻는다.
세계적인 흐름도 심상치 않다. 2024년 12억 달러 규모였던 가정용 사우나 시장은 2035년 35억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콘트라스트 테라피가 웰니스 루틴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해외 유명인들이 앞다투어 사우나의 효능을 공유하며 관심에 기름을 붓는다. 가장 오래된 것이 갑자기 가장 앞선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공간도 진화했다. 낡은 타일과 뿌연 거울만 있는 게 아니다. 강남에는 재즈 라운지와 갤러리형 인테리어를 갖춘 사우나가 생겼다. 홍대에는 전통 흙탕방과 화덕방을 갖춘 24시간 사우나가 젊은 층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 부산에서는 해운대 바다를 조망하며 핀란드식 건식 사우나를 즐길 수 있고, 양평에는 식물원 콘셉트의 찜질방도 있다. 도쿄에서는 90년 된 센토가 DJ 부스와 크래프트 맥주 바를 결합한 소셜 라운지로 재탄생했다. 동네 노인과 젊은 크리에이터가 같은 공간에서 땀을 흘리는 뜻밖의 세대 통합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사우나가 다시 뜬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유행이라기보다 재발견이다.
더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더 외롭고, 더 많은 자극을 받지만 더 회복이 안 되는 시대. 도시는 갈수록 빠르고 밝고 시끄러워지는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반대편을 찾는다. 뜨거운 물, 차가운 물, 김, 침묵. 이 단순하고 오래된 조합이 하루를 다시 정리한다.
한동안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에서 해방감을 찾으려 했다. 더 자극적인 취미, 더 색다른 여행, 더 힙한 공간. 그러나 실제로 필요했던 건 오래된 방식으로 자신을 복구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일, 땀을 흘리는 일,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일.
사우나가 다시 발견된 이유는 결코 새로워서가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이 덧붙은 시대에, 끝내 지워지지 않고 거기 남아 있어서다. 굴뚝이 식어도, 연기가 멎어도, 뜨거운 물은 계속 거기 있었다. 사람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