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는 말

오래된 과거가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쉽게 현재를 지워버린다. 하지만 그 사이의 시간까지 함께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사회일까.

Share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는 말

또 한번 누군가의 과거 범죄 전력이 대서특필 됐다. 오래전 사건의 연도와 죄명이 짧고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몇 줄 읽자마자 곧바로 저마다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놀랍다기보다 허탈하다는 반응이 먼저 나왔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런 말을 하고 저런 얼굴로 살아왔느냐는 식의 분노였다. 댓글창 역시 비슷한 반응이다. 역시 사람은 안 변한다. 결국 위선이었다.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대중이 가장 크게 화를 내는 지점은 꼭 범죄 사실 그 자체만은 아니다. 배신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현재를 보고 그 사람을 이해했다고 믿는다. 그가 했던 말, 보여준 태도, 쌓아온 이미지에 어느 정도 마음을 준다. 그런데 오래전의 어두운 기록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사람들은 과거보다 먼저 현재를 의심한다. 저 선한 얼굴이 다 가짜였던 것 아니냐고. 분노는 대개 거기서 시작된다. 죄에 대한 분노이면서 동시에 속았다는 기분에 대한 분노다.

그 감정은 이해할 만하다. 다만 그다음부터는 조금 천천히 생각해볼 중요한 문제가 있다. 오래전 범죄 전력이 뒤늦게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그 뒤에 살아온 모든 시간이 한순간에 무효가 되는 것은 과연 당연한 일일까. 우리는 쉽게 말한다. 10년이든 20년이든 그냥 가면을 쓰고 산 것뿐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10년과 20년은 한 사람이 바뀌기에도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 시간을 모두 연기라고 단정하는 일은 쉽다. 어려운 일은, 그 긴 시간 동안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을 함께 생각하는 일이다.

이 말은 과거의 범죄를 가볍게 보자는 뜻이 아니다. 그건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잘못은 잘못이다. 피해가 있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다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건, 과거의 잘못을 비판하는 일과 한 사람의 이후 삶 전체를 지워버리는 일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하나는 책임을 묻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닫아버리는 일이다.

물론 가해자가 얼마나 변했는지 이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논하기 전에, 그 범죄로 인해 일상을 잃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논리로도 뒤로 밀려선 안된다. 피해자에게 과거는 과거가 아닐 수 있다. 가해자가 조용히 새 삶을 살아가는 동안 피해자는 여전히 그 시간 안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변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도, 피해의 무게는 먼저 인정되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이 논의 전체가 가해자 중심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 전제 위에서, 더 어려운 질문을 꺼내보자. 다른 범죄는 몰라도 성범죄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닐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 그 이유도 분명하다. 성범죄는 단순한 규정 위반이 아니라, 누군가의 존엄과 안전을 직접 건드리는 범죄다. 피해가 오래 남고,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그것을 너무 쉽게 넘기거나 덮어온 적도 많았다. 그래서 성범죄만큼은 더 엄격하게 봐야 한다는 감정은 충분히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엄격하다는 말이 곧 시간과 변화까지 모두 지워야 한다는 뜻일까. 형벌 제도 자체가 처벌 이후의 삶을 전제로 한다. 벌을 받았다면 다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성범죄만은 예외로 영구 배제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결국 교화라는 말도 힘을 잃는다. 그렇다고 오래전 일이니 다 끝났다고 말해버리는 것도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래서 성범죄를 둘러싼 판단은 더 세밀해야 한다. 반복된 문제였는지, 현재의 역할이 신뢰와 안전을 강하게 요구하는 자리인지, 과거를 숨긴 채 도덕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는지,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실제로 다른 삶을 살아왔는지. 이런 것들을 함께 봐야 조금이라도 공정한 판단에 가까워질 수 있다.

특히 공인의 경우 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대중의 신뢰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과거 역시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공인이라고 해서 과거가 무제한으로 현재를 삼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건 오래전 사건이 지금 이 사람의 역할과 직접 연결되는지, 지금도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충격적인 과거를 현재의 망신으로 다시 소비하고 있는지 구분하는 일이다. 이 구분이 사라지면 검증은 금방 구경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위선이 가장 싫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일부는, 사실 변화의 흔적일 수도 있다. 과거를 깨끗이 지울 수는 없지만 그 이후를 다르게 살려고 애쓴 시간 말이다. 물론 그것이 진심인지 계산인지, 바뀐 것인지 숨긴 것인지는 바깥에서 쉽게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한다. 너무 빨리 단정하면 우리는 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 자체를 비웃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회는 대체로 가장 쉬운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하차, 퇴출, 삭제, 은퇴. 속은 시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원한 결말이 늘 좋은 결말은 아니다. 더 나은 결말은 훨씬 덜 통쾌하고, 대신 조금 더 복잡한 것일 수 있다.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고, 과거의 잘못을 분명히 비판하고, 피해의 무게를 먼저 인정한 뒤, 그 사람이 그 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함께 보는 것. 그 과정 끝에 비판이든 퇴장이든 복귀든 사회가 판단하는 것.

결국 이 문제는 특정 인물 한 사람에 대한 찬반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다. 잘못에 분명히 책임을 묻되 그 이후의 삶과 변화를 함께 보려는 사회인지, 아니면 한 번의 과거로 평생을 판단하는 사회인지. 성범죄처럼 더 엄격해야 할 문제 앞에서도, 엄격함과 영구 낙인을 같은 말로 취급하지 않을 수 있는지. 오래된 잘못 앞에서 분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더 어려운 건,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함께 믿는 일이다. 그 두 가지를 우리가 동시에 붙들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