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박탈감

더 받은 사람이 아니라, 덜 받은 기분이 문제다. 이미 충분한 사람도, 옆의 기준 앞에서는 쉽게 부족해진다. 만족은 조건이 아니라 거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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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박탈감

SK하이닉스 직원이 성과급으로 최대 13억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확히는 한 외국계 증권사가 내년 영업이익을 447조 원으로 전망하고 그 10%를 직원 수로 나눈 계산. 업계 현실적 전망은 1인당 5억 8천만 원 선이고 SK하이닉스 직원들조차 '근거 없는 루머'라고 호소했지만, 뇌리에 박힌 숫자는 이미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꽂힌 숫자만 기억된다.

최근 삼성전자 노조가 파업을 선언했다. 회사 제안은 메모리사업부 기준 1인당 평균 5억 4천만 원. 노조가 원한 건 그 금액이 아니라 영업이익 15%를 상한 없이 보장하는 '제도'였다. 옆 회사와 같은 수준을 맞춰 달라는 이야기. 소문 속 13억과 테이블 위 5억 4천의 간극이 파업을 불렀다. 이른바 상대적 박탈감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편리한 단어다. 이 말 앞에 붙으면 어떤 감정이든 정당해진다. 5억을 받는 사람이 박탈감을 느껴도 그럴싸하고, 5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느껴도 그럴싸하다. 이 단어는 숫자를 먹지 않는다. 오로지 '옆 사람과의 거리'만 먹는다. 인간은 배가 고파서 불행한 게 아니라 옆 사람이 더 배부르면 불행한 동물이다. 5억을 받아도 옆이 13억이라면, 심지어 그 13억이 증권사가 계산한 가상의 숫자라 해도, 자기 5억은 초라해진다. 이 감정 계산기의 가장 고약한 점은 눈금이 항상 위로만 향한다는 것. 사람은 하루 종일 올려다본다. 목이 아플 수밖에 없다.

이 사태의 구조는 박탈감이 사다리처럼 걸려 있다는 점이다. 맨 위 칸의 SK하이닉스 직원은 옆 임원의 수십억 연봉에 박탈감을 느낀다. 아래 칸의 삼성전자 직원은 SK하이닉스를 올려다보며 박탈감을 느낀다. 그 아래 칸에는 반도체 장비·소재·세정·가스를 납품하는 협력사 직원이 있다. 평균 연봉 5천만 원, 대기업 엔지니어가 성과급 포함 3억 원대를 받는 것과 여섯 배 차이. 같은 공장 안에서 작업복을 갈아입고 일하는데 통장의 숫자는 여섯 배다. 그 아래엔 공장 지역 자영업자가 있다. 파업이 나면 매출이 반 토막 나는데 이유가 '5억이 부족해서'라는 사실에 박탈감과 황당함을 동시에 느낀다. 모든 칸에서 모두가 위를 올려다본다. 모두가 같은 단어를 쓴다. 박탈감.

문제는 박탈감이 공용어인데 각자가 쓰는 뜻이 다르다는 것. "5억이 부족하다"는 박탈감은 '정당한 몫'의 언어다. 임원에겐 없는 성과급 상한선이 왜 직원에게만 있느냐, 투명한 기준으로 나누자는 분배 정의의 언어. 논리적이고 조직적이어서 노조라는 형태로 말해지고 파업이라는 행동으로 표현된다. 반면 "5억도 많은데 뭐가 부족하냐"는 박탈감은 '존재의 비교'라는 언어다. 저 사람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의 격차 자체가 숨 막힌다는 존재론적 감각. 흩어져 있고 댓글로만 표현되며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다. 분배의 문법으로 말하고 존재의 문법으로 듣는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번역이 안 된다.

옛날의 계층 갈등은 단순했다. 자본가 대 노동자. 전선이 굵고 선명해서 연대가 가능했다. 지금은 같은 '노동자'라는 이름 안에 대기업 정규직부터 플랫폼 노동자까지 여섯 배 차이가 난다. 같은 공장 건물에서 일해도 소속이 다르면 연봉이 6분의 1로 꺾인다. 전선은 쪼개졌고 겹 사이마다 박탈감의 골짜기가 파여 있다.

그래서 이번 사태의 가장 기묘한 장면은 노동자가 노동자의 파업을 욕하는 장면이다. 비판자 중 상당수가 자본가가 아니라 협력사 직원, 중소기업 직원,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다. "너네 5억이 부족해?"라는 말이 자본가의 입보다 이들 입에서 먼저 나온다. 계층 갈등이 더는 수직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직 갈등보다 수평 갈등이 더 시끄러운 시대. 수직 방향은 너무 멀어서 감정이 도달하지 않는다. 오너 일가의 상속세 이야기는 다른 세계 이야기로 들리는데, 옆 칸의 누군가가 5억 받는다는 소식은 살을 에는 감각으로 다가온다.

박탈감의 본질은 '비교 불가능한 것을 비교하는 데서 오는 오류'다. 남의 인생과 내 인생은 원래 비교할 수 없는데, 숫자라는 도구로 억지로 비교한다. 연봉, 평수, 차종, 성과급. 숫자로 환산되는 순간 삶은 비교 가능해지고, 비교 가능해지는 순간 박탈감이 시작된다. 그런데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엔지니어가 새벽 3시 클린룸에서 느끼는 피로, 협력사 기술자가 원청 전화를 받을 때의 굴욕감, 알바생이 바코드를 찍을 때의 무감각. 이것들은 비교되지 않아서 박탈감의 언어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공론장에 오르지 못한다. 가장 크게 말하는 박탈감이 가장 정당한 박탈감이 되고, 말할 힘이 없는 박탈감은 박탈감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박탈감이 큰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세상. 이게 이 시대 계층 갈등의 진짜 얼굴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성과급 결의대회에 나가고, 누군가는 단가 인하 압박에 시달리고, 누군가는 빗길을 달려 배달을 가고, 누군가는 반값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각자의 저녁에 각자의 박탈감이 있다. 그 박탈감들은 서로 만나지 않고, 만나더라도 통역되지 않는다. 박탈감이 우리를 묶어주는 대신 찢어놓는다. 모두가 쓰는 단어가, 아무도 같은 뜻으로 쓰지 않는 단어가 되어버리는 것. 이게 공용어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