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나라

어느 순간부터 거의 모든 것 앞에 K가 붙기 시작했다. K팝과 K드라마에서 시작된 이 알파벳 하나는 이제 음식과 산업을 넘어 눈치와 회식, 층간소음과 재난문자, 심지어 얼죽아와 부먹찍먹 같은 사소한 취향까지 포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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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나라

K가 싫다. 정확히는, 좀 지겹다. K팝, K드라마, K푸드까지는 괜찮았다. 거기엔 진짜 힘이 있었고, 세계가 먼저 불러준 이름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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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처음 K는 꽤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두유노우?"로 말을 걸어야 하는 나라였다. 그러다 어느 날 세계가 먼저 알아보기 시작했다. K는 그 안도감의 표식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오래 기다린 사람이 드디어 자기 이름이 불리면 몇 번쯤 더 확인하고 싶은 법이니까.

그런데 그게 거의 10년째다.

세계는 이미 한국을 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 앞에 K를 붙이며 "이거 한국 거예요"를 강조한다. 자신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급함이다. 아무도 J푸드니 F와인이니 떠들지 않는다. 스시는 그냥 스시고, 샴페인은 그냥 샴페인이다. 그 이름들은 국적을 들이밀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 K를 붙일수록 커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다.

그래서 K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단,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K 말고.

Kenya — K-커피

케냐 커피는 강렬한 산도와 복잡한 풍미로 커피 세계의 파워하우스로 불린다. 블랙커런트, 핑크 자몽, 야생 꿀, 캔디드 바이올렛. 커피가 아니라 향수 광고 카피 같지만, 실제로 이 맛이 난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어, 이게 뭐지?" 하고 컵을 다시 내려다보게 만드는 종류의 맛이다.

비결은 땅이다. 해발 4,500피트에서 6,500피트 사이 고지대에서 자라는 케냐 커피는 서늘한 기온 덕분에 과일의 천연 산과 당분이 천천히, 고스란히 농축된다. 그것이 케냐 특유의 와인 같은 산도로 완성된다. 화산 토양, 적도의 태양, 고산의 냉기. 이 셋이 원만하게 합의를 보면 케냐 AA가 나온다.

그리고 케냐에는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엘리우드 킵초게는 2016년과 2020년 올림픽 마라톤 챔피언으로, 역대 가장 위대한 마라토너 중 한 명으로 널리 꼽힌다. 그는 2019년 빈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마라톤 42.195킬로미터를 1시간 59분 40초에 완주했다. 두 시간의 벽.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 벽을. 당신이 아침에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는 동안, 그는 이미 10킬로미터를 몸풀기 삼아 달렸을터다.

Kazakhstan — K-로켓

카자흐스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영화 '보랏'을 떠올린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매우 못마땅해한다. 왜냐하면 그건 카자흐스탄의 진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이코누르 코스모드롬. 카자흐스탄 땅 위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우주 발사 시설이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인이 모두 이곳에서 출발했다. 카자흐스탄의 광활한 스텝 초원, 그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평원이 인류를 처음으로 우주로 쏘아 올린 발사대였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땅 아래도 마찬가지다. 카자흐스탄은 전 세계 우라늄 생산량의 약 43%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우라늄 생산국이며, 90여 가지 광물이 매장된 지구상 가장 전략적인 자원 국가 중 하나다. 겉으로는 황량한 초원이지만 땅 속은 주기율표가 통째로 들어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에서 면적이 아홉 번째로 큰 나라. 인류 최초의 우주 발사대를 품은 나라. 카자흐스탄은 자신들의 스텝 위에 로켓을 세웠다. 홍보 문구가 아니라 진짜 로켓을. 그 로켓은 지금도 날아가고 있다.

Kuwait — K-펀드

쿠웨이트 투자청 KIA는 1953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국부 펀드다. 쿠웨이트가 독립한 건 1961년이다. 즉, 나라가 생기기도 전에 미래 세대를 위한 저축을 시작했다. 국가 수립보다 저축이 먼저였던 나라. 이건 선견지명이 아니라 거의 강박이다. 좋은 의미에서.

결과는? 2025년 기준, KIA는 약 1조 290억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세계 5위 규모의 국부 펀드다. 쿠웨이트 인구는 450만 명이다. 1인당으로 나눠보면 숫자가 이상해진다. 계산기가 잠깐 멈칫할 정도로.

더 우아한 건 철학이다. 쿠웨이트는 '미래 세대 펀드'를 따로 운영하며, 매년 국가 수입의 최소 10%를 의무적으로 넣는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쿠웨이티를 위해. 석유가 언젠가 바닥난다는 걸 70년 전에 이미 알았고, 그날을 위해 조용히 준비해왔다. 요란하게 K-펀드라는 이름을 달지 않고. 그냥 1조 달러를 운용하면서.

Kyrgyzstan — K-로드

키르기스스탄은 국토의 90% 이상이 산으로 덮인 나라다. 텐샨 산맥이 지형을 지배하고, 그 사이에 세계 두 번째로 큰 고산 호수 이식쿨이 있다. 세상의 길이 지도 위에 그려지기 훨씬 전부터, 상인들은 이 산을 넘었다. 사방이 눈 덮인 봉우리인데 호수는 절대 얼지 않는다. 이 나라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디테일이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결코 굳지 않는.

키르기스인들은 실크로드의 혈맥이었다. 뛰어난 기마술과 지형 장악력으로 카라반 루트의 보호자, 안내자, 교역자 역할을 했다. 동서양의 온갖 물건과 언어와 종교가 이 산들 사이를 통과했다. 키르기스인들은 그 길목을 지키며, 중개하며, 살았다. 실크로드는 사실 상당 부분 키르기스스탄의 산길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엔 50만 행이 넘는 세계 최장 구전 서사시 마나스가 있다. 문자 없이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진 이야기다. 산에서 산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키르기스스탄은 이것을 K-서사시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삶이라고 부른다. 외울 게 50만 행이나 되니 삶이 맞다.

Kiribati — K-소멸

키리바시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위치 설명이 필요하다. 대부분이 처음 들어봤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름 발음도 '키리바스'가 맞다. 철자와 발음이 다른 것부터가 이미 기억하기 어렵다.

키리바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네 개의 반구를 모두 접하는 나라다. 32개의 환초와 하나의 산호섬이 호주와 하와이 사이, 130만 제곱마일의 바다 위에 흩어져 있다. 땅덩어리는 작지만 바다 영토는 미국 본토만큼 넓다. 문제는 그 바다가 지금 조금씩 육지를 먹어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키리바시의 대부분 섬들은 해발 2미터 미만이며, 세계에서 기후변화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는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이미 1990년대 말, 두 개의 무인도가 파도 아래로 사라졌다. 지도에서 지워진 것이다. 국가가, 섬이.

이곳에는 1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4,000년의 문화가 있다. 코코넛 익은 정도를 표현하는 단어가 12가지나 있는 언어가 있다. 이 나라는 전 세계 온실가스의 0.6%도 내뿜지 않으면서, 그 결과를 지구에서 가장 먼저 감당하고 있다. 키리바시는 이 상황을 브랜딩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그럴 여유도 없다. 그냥 살아남으려 한다.


아무도 자기 것에 K를 붙이지 않는다. 붙일 생각을 안 한 게 아니라, 붙일 필요가 없어서다. 케냐 커피는 그냥 케냐 커피고, 바이코누르 코스모드롬은 그냥 로켓발사대이고, 마나스 서사시는 그냥 마나스다. 이름 앞에 국적 스티커를 먼저 붙여야 하는 건, 그 이름만으로는 아직 모자라다는 신호다.

자긍심을 갖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이미 한국을 안다. 이제 K를 하나씩 떼어낼 때가 됐다. 그래야 각자의 것이 각자의 얼굴로 설 수 있다. 음악은 음악으로, 영화는 영화로, 음식은 음식으로.

K는 그저 알파뱃 26개 중 하나일 뿐이다. 케냐도, 카자흐스탄도, 키리바시도 함께 쓰는, 그냥 알파벳. 우리가 요즘 자주 빌려 썼을 뿐이다.

슬슬 돌려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