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4일제는 과연 불가능한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이 문장은 약 2,000년 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일부 신자들이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며 일손을 놓고 공동체에 기대어 살자, 바울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노동은 미덕이었고, 게으름은 죄악이었으며, 밥 한 끼는 그에 마땅한 땀의 대가여야 했다.
사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20세기 초, 레닌이 이 문장을 소비에트 헌법에 집어넣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신약성경의 한 구절이 혁명의 깃발 아래 붙여진 것이다. 종교와 이념이 그토록 서로를 혐오했음에도,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지점에서만큼은 완벽하게 의견이 일치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00년 전 인류에게 노동이란 선택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밭을 갈지 않으면 굶었고, 짐승을 잡지 않으면 떨어야 했다. 하루 열두 시간 노동은 덕목이기 이전에 물리적 현실이었다. 만약 성경이 이레째 날에 쉬라고 명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마 일요일이라는 개념 자체를 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휴식은 신이 허락한 예외였지,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가 안다. 산업혁명이 왔다. 증기기관이 사람의 근육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공장이 논밭을 밀어냈다. 19세기 영국의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주 7일을 일했다.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8시간 노동'은 당시 혁명적 구호였다. 자본가들은 그것이 산업 문명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구호가 현실이 되는 데 수십 년의 투쟁이 걸렸고, 오랜 투쟁 끝에 인류는 엿새째 날도 쉬는 권리를 쟁취했다. 주말이라는 개념이 법적으로 정착된 것은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주 5일 40시간 근무제는 놀랍도록 최근의 발명품이다.
정보통신혁명은 그다음 라운드였다. 이번엔 근육이 아니라 단순 반복적 사무 노동이 자동화의 표적이 되었다. 스프레드시트 하나가 회계사 열 명을 대체했고, 검색 엔진 하나가 사서 수백 명의 역할을 흡수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바빴다. 일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일의 종류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인간은 놀라운 적응력으로 새로운 쓸모를 찾아냈다.
이제 세 번째 파도가 밀려온다. 이번엔 AI다.
AI 시대, 4일의 노동도 과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몇몇 실리콘밸리 괴짜들의 사고 실험처럼 들렸다. 하지만 '주 5일제'도 한때는 그랬다. 1926년, 헨리 포드는 당시 기준으로 보면 거의 미친 짓에 가까운 결정을 내렸다. 주 6일 근무를 5일로 줄인 것이다. 경쟁자들은 비웃었다. 생산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노동자들은 더 집중했고, 결근율은 떨어졌으며, 공장 바닥의 사고도 줄었다. 포드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여가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물건을 산다." 그는 인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본가였다. 그리고 그것이 요점이었다. 제도는 익숙해지면 자연법칙처럼 보인다. 주 5일제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실험은 이미 다시 시작됐다. 그것도 꽤 큰 규모로. 2021년 아이슬란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주 4일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2,500명 이상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몇 년간 진행된 이 실험에서, 생산성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향상됐고, 노동자들의 번아웃은 줄었으며, 스트레스 지표는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뒤이어 영국, 일본, 스페인, 뉴질랜드에서도 비슷한 실험들이 이어졌다. 결과는 놀랍도록 일관됐다. 주 4일제는 더 이상 사고 실험이 아니다. 데이터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일본 지사는 2019년 주 4일제를 한 달간 시범 운영하며 생산성이 크게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주목할 것은 수치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루를 줄였더니 사람들이 남은 나흘을 더 잘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회의는 짧아졌고, 쓸모없는 이메일은 줄었으며, 집중도는 높아졌다.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일다운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주 5일이나 일하고 있나
사무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여러 연구에 따르면, 하루 8시간 근무 중 실제로 집중해서 생산적인 작업을 하는 시간은 평균 2~3시간에 불과하다. 나머지 시간은 이메일을 확인하고, 의미 없는 회의에 앉아 있고, 바쁜 척하는 데 쓰인다. 이것은 개인의 나태함이 아니다. 인간의 뇌가 고강도 집중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에는 생물학적 한계가 있다. 우리는 8시간짜리 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8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주 5일제의 상당 부분은, 사실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다.
게다가 AI는 이 방정식에 새로운 변수를 집어넣고 있다. 반복적인 데이터 처리, 초안 작성, 일정 조율, 보고서 요약 — 화이트칼라 노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던 이 작업들이 빠른 속도로 자동화되고 있다. 맥킨지와 골드만삭스의 보고서들은 현재 직업의 상당수에서 AI가 업무의 30~50%를 대체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 이것은 일자리 소멸의 공포로 읽힐 수도 있지만, 다른 방향으로 읽을 수도 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의 양 자체가 줄어든다면, 같은 결과물을 더 짧은 시간에 낼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당시에도 기계가 노동자를 대량 실업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실제로는 노동의 총량이 줄지 않았다. 다만 노동의 성격이 바뀌었고, 단위 시간당 생산성이 올라가면서 노동 시간이 서서히 줄었다. 우리는 지금 그 과정의 다음 단계에 있다.
걱정은 다른 데 있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인류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동화를 꿈꿔왔는데, 정작 자동화가 눈앞에 오자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 "그럼 사람은 뭘 하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정답은 너무 간단하다. 쉬면 된다. 늦잠을 자고, 아이를 데리러 가고, 병원에 가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고, 밥을 해먹고, 멍하니 있어도 된다. 아무 쓸모 없는 취미를 가져도 된다. 인간은 원래 생산성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여가 앞에서도 불안해한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그 시간으로 자기계발을 해야 할 것 같고, 운동을 해야 할 것 같고, 브런치에 글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다. 여가조차 성과로 증명해야 직성이 풀린다. 쉬는 법마저 성실하게 배워야 하는 인간. 이것이야말로 현대 노동의 가장 우스운 후유증이다. 우리는 일하는 법은 수천 년에 걸쳐 갈고 닦았지만, 쉬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막상 여유가 주어지면 그것을 또 다른 과업처럼 대한다. 그리고 이 불안이야말로, 주 4일제 논쟁에서 가장 적게 언급되지만 가장 중요한 장애물일지 모른다. 제도가 바뀌어도 내면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의 여유를 또 다른 생산성으로 채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 4일 근무를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곧바로 묻는다. "그럼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나."
하지만 이 질문도 조금은 낡았다. 이미 경제는 꼭 인간이 오래 일해야만 돌아가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래 일하는 것보다 잘 설계된 시스템이 경제를 더 멀리 끌고 간다. 물론 어떤 일은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한다. 돌봄, 의료, 교육, 서비스, 현장 노동 같은 영역은 시간을 함부로 줄이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줄일 수 있는 곳부터 줄여야 한다.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무도 줄이지 못한다면, 기술 발전은 결국 일부 산업의 이익과 일부 직군의 과로만 키우는 장치가 된다.
주 4일 근무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그것은 방향표지판에 가깝다. 인류가 기술을 왜 발전시켰는지 잊지 말자는 표지판.
물론 가장 강력한 저항은 숫자가 아니라 관성에서 온다. 많은 사회에서, 특히 장시간 노동이 성실함의 증거로 여겨지는 곳에서, 일찍 퇴근하는 사람은 의심받는다. 하지만 관성도 바뀐다. 천천히, 그리고 어느 순간 한꺼번에.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이미 이전 세대와 다른 언어로 일을 말하고 있다. 번아웃을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문화는 서서히 촌스러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세대가 교체되면, 무엇이 당연한가에 대한 감각도 함께 교체된다.
결국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AI 시대에도 여전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2,000년 된 문장을 삶의 기본값처럼 붙들고 살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조금 다른 문장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이런 문장 말이다.
"기계가 더 일한다면, 인간은 더 놀아도 된다."
이 문장이 성립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기술 발전의 과실이 실제로 노동자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40년의 역사는 그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생산성은 올랐지만 임금은 제자리였고, 여유는 늘지 않았으며, 이익은 주주에게 돌아갔다. 기계가 더 일하게 만드는 것과, 그 덕분에 인간이 더 살 수 있게 되는 것 사이에는 자동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없다. 그 다리는 정치이고, 제도이고, 협상이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기계에게 일을 넘기는 꿈을 꿔왔다. 이제 막 그 꿈이 실현되려는 순간, 우리는 왜인지 겁을 먹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일을 잃는 것이 아니라, 일 없이도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것이 주 4일제보다 훨씬 풀기 어려운 문제라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