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유사 연애감정의 위험성
고백도, 스캔들도, 드러난 폭력도 없이 시작된 유사 연애감정은 친절을 오해하고, 예의를 신호로 읽고, 끝내 한 사람의 일터를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바꿔놓는다. 그 애매하고도 질긴 착각을 멈춰야 한다.
회사에는 이상한 종류의 비극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별일 아닌데, 당하는 사람만 돌아버릴 것 같은 일. 이를테면 누군가가 혼자서만 썸을 타고, 혼자서만 관계를 키우고, 혼자서만 서운해하다가, 나중에는 조직 전체를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다. 법적으로 딱 잘라 제재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가볍게 넘기기엔 너무 피곤하다. 성추행도 아니고, 노골적인 고백도 아니고, 드라마처럼 “나 사실 당신 좋아했어” 하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대신 더 한국의 회사답게, 더 음습하고 더 애매하게 번진다. 이런 걸 직장 내 ‘유사 연애감정’이라 부른다.
이 감정은 대체로 친절을 연애 신호로 오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실 회사에서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웃는다. 안 웃으면 일이 더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부하직원은 상사에게 친절할 수밖에 없고, 상사도 부하직원에게 어느 정도는 부드럽게 군다. 동료도 마찬가지다. 메신저에 애써 이모티콘 하나 더 붙이고, 커피 한 잔 건네고,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말한다. 원래 회사라는 곳은 다들 그렇게 적당히 ‘사람’인 척하면서 버티는 공간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걸 다르게 받아들인다. 아, 이 사람이 나한테만 유독 다정하네. 나를 챙기네. 내 농담에 잘 웃네. 이건 뭘까. 아닐까. 맞는 것 같은데.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그 사람의 착각이 대체로 아주 성실하게 자란다는 점이다.
직장은 ‘감정의 비닐하우스’ 같은 곳이다. 바깥에서는 도무지 싹틀 일 없는 감정도, 이상하게 회사 안에만 들어오면 무럭무럭 자란다. 매일 본다. 자주 대화한다. 남들은 모르는 고충을 공유한다. 함께 욕할 사람도 있고, 함께 버틸 이유도 있다. 집보다 오래 있는 날도 많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는 그 관계가 실제보다 훨씬 특별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그 특별함이 대개 혼자만의 것이라는 데 있다. 상대는 그냥 일 잘 되라고 친절했던 건데, 한쪽에서는 이미 프롤로그를 지나 2막으로 넘어가 있다. 혼자서.
여기서부터 회사는 조금씩 이상해진다. 원래 인간관계라는 건 늘 좋을 수 없다. 직장에서는 더 그렇다. 회의하다가 틀어질 수도 있고, 부탁 하나 거절당했다고 서운할 수도 있고, 보고 라인 때문에 얼굴 붉힐 수도 있다. 보통 이런 갈등은 이성적으로, 아주 건조하게 봉합된다. 미안합니다. 오해였습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끝. 그런데 유사 연애감정이 섞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갑자기 모든 갈등이 감정 서사의 일부가 된다. 답장이 늦으면 나를 피하나 싶고, 회의 때 말투가 차가우면 변했다 싶고, 다른 직원에게 웃는 걸 보면 괜히 속이 뒤집힌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관계가 혼자 머릿속에서 시작됐다가, 혼자 배신당하고, 혼자 파국으로 치닫는다. 보는 사람들만 어리둥절하다. 아니, 두 분이 원래 뭐가 있었어요? 없었는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싸워요? 그걸 설명할 수 있으면 벌써 일이 이렇게 안 커졌겠지.
더 피곤한 건 피해자 입장이다. 이게 제일 환장할 노릇이다. 차라리 사건이 명확하면 낫다. 누가 봐도 잘못인 행동이 있었고, 선이 분명히 넘었고, 그래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면 말이라도 쉽다. 그런데 직장 내 유사 연애감정은 늘 애매하다. 상대는 대놓고 뭘 한 것도 아닌데 공기를 이상하게 만든다. 괜히 서운한 티를 내고, 기분 나쁜 농담을 던지고, 사람들 앞에서 미묘하게 태도를 바꾼다.
그러다가 주변에는 “내가 오해한 건가 보다” “나는 잘해보려던 건데” 같은 억울한 표정까지 깔아둔다. 당하는 사람은 미치고 팔짝 뛴다. 내가 성추행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닌 것도 아니고, 그런데 회사 분위기는 계속 썩어간다. 결국 남는 건 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공기, 그리고 퇴사를 고민하는 멀쩡한 사람 한 명이다.
이런 일이 유독 자주 벌어지는 이유는 회사가 착각하기 좋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집에서 존중받지 못하거나, 일상에서 자기 존재감이 말라버린 사람일수록 직장의 작은 친절을 과하게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나이 든 싱글에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오히려 나이 든 유부남 상사에게서 더 자주 목격되곤 한다. 물론 모든 중년 남성을 싸잡아 말할 수는 없지만, 조직 안에서는 이상할 만큼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20대 여성 사원이 예의 있게 웃고, 빠르게 반응하고, 업무상 필요한 친절을 보였을 뿐인데 그것을 자신을 특별히 편하게 여기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식이다.
문제는 그 친절이 개인적 호감이 아니라 직장인의 기본값이라는 데 있다. 젊은 직원은 대개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 애쓰고, 상사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더 부드럽게 응대한다. 그런데 일부 나이 든 유부남은 그 사회적 예의를 자신이 아직 매력적이라는 증거처럼 오독한다. 가정에서는 점점 사라진 존중과 관심을 회사에서 되찾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감정은 폭발적으로 번진다. 본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설렘일지 몰라도, 상대에게는 웃을 수도 화낼 수도 없는 피로와 공포가 된다.
외로움 자체는 결코 핑계가 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문제는 자기 외로움을 타인의 마음으로 번역해버릴 때다. 상대는 그저 직업적으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을 뿐인데, 그걸 ‘나를 특별히 생각하는구나’로 해석하는 순간 모든 게 꼬인다. 세상에는 친절한 사람이 있고, 그중 상당수는 정말 아무 뜻이 없다. 이 당연한 사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끝내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회사에서는 종종 이런 착각이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나는 진심이었다고. 마음이 생긴 걸 어떡하냐고. 사람 좋아한 게 죄냐고. 물론 좋아하는 마음 자체를 죄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상대가 원치 않는데도 감정의 책임을 떠넘기고,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위기를 망치고, 본인의 실망을 조직 전체의 불편으로 확장시키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순정이 아니다. 민폐다. 아주 질척한 민폐다. 회사는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라 월급 받고 일하러 오는 곳인데, 혼자만 출연자처럼 구는 사람이 꼭 있다.
생각해보면 직장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대놓고 무례한 사람이 아닐 때도 많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다들 경계한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나는 그냥 잘해줬을 뿐이다. 나는 챙겨줬을 뿐이다. 나는 마음이 있었을 뿐이다. 상대 입장에서는 그 순수함이 가장 피곤하다. 예의는 있었는데 눈치가 없고, 친절은 있는데 경계가 없고, 감정은 있는데 상호성은 없다. 이쯤 되면 로맨스가 아니라 재난에 가깝다.
“저 사람, 나를 좀 특별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대부분은 아니다. 때론 다정함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