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국수, 그 배덕감에 관하여
국수를 먹으러 갔지만, 결국 국물을 마시고 나온다. 면은 핑계고, 콩물이 본심이다.
며칠 전이었다. 날이 갑자기 더워졌다. 아직 여름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데, 콩국수가 떠올랐다. 급한대로 인근의 몇 곳을 들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아직 시작 안 했어요.”
계절은 이미 도착했는데, 메뉴는 아직 준비 중이다. 며칠의 시차가 사람을 더 집요하게 만든다.
콩국수는 그런 음식이다. 여름이 와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음식. 더위가 일정 수준을 넘어야 비로소 개시하는 음식. 따뜻한 국물은 날씨와 싸워도 이기지만, 차가운 국물은 날씨의 편을 들어야 한다. 콩국수는 철저히 후자다. 그래서 애매한 시기에는 먹을 수 없고, 그래서 더 먹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음식의 진짜 특이함은 따로 있다. 우리는 콩국수를 ‘국수’라고 부르지만, 이 음식의 중심에는 사실 면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있어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국수라는 장르는 원래 면 중심이다. 라면도, 칼국수도, 냉면도 결국은 면의 이야기다. 국물은 면을 빛내기 위한 배경이다. 그런데 콩국수는 다르다. 사람들이 집중하는 건 콩물이다.
“진하다”, “고소하다”, “걸쭉하다.” 평가의 언어가 전부 국물에 붙어 있다. 면에 대한 감상은 거의 없다.
면은 무엇을 하느냐. 운반한다. 콩물을 입까지 데려오는 역할. 일종의 도구다. 숟가락이자 포크같은. 없어도 큰일은 아니지만, 있기에 이 음식을 ‘국수’라고 부른다. 콩국수는 그 형식을 빌려 온다. 그래서 어엿한 한 끼 식사로 대접받는다.
이 음식의 정체가 가장 분명해지는 순간은 마지막이다. 면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릇을 들어 올리고 남은 콩물을 마신다. 거의 의식처럼. 라면 국물은 남겨도 되지만, 콩국수에서 국물을 남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게 진짜 주인공이니까.
우리는 국수를 먹으러 왔다고 말하지만, 결국 콩물을 마시고 돌아간다. 면은 알리바이다. “국수 먹으러 왔어요”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쯤 되면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어디에서 그 ‘국물’을 마실 것인가.
서울에서 콩국수로 이름이 확실하게 박힌 집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냉면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연중 판매할 수 없는 계절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진주회관
광화문 직장인들에게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에 가깝다. 이 집의 콩국수는 설명이 단순하다. 진하다. 아주 노골적으로 진하다. 첫 입에서 콩의 밀도가 밀려오고, 거의 씹히는 느낌에 가깝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 이상이 없다. “콩국수는 이렇게 먹는 거다”라는 기준을 세운 집.
진주집
여의도의 오래된 선택지. 진주회관이 밀도로 밀어붙인다면, 이곳은 좀 더 균형이 잡혀있다.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과하지 않아서 오히려 오래 간다. 누구를 데려가도 실패하지 않는 스타일. 콩국수의 ‘표준형’에 가장 가까운 집이다.
맛자랑
여기는 소면이 아니라 메밀면을 쓴다. 그래서 식감부터 다르다. 조금 더 거칠고, 더 시원하게 끊긴다. 그 위에 올라오는 콩국은 상당히 걸쭉하다. 거의 말아 먹는다기보다 비벼 먹는 쪽에 가깝다. 숟가락으로 떠야 할 정도의 밀도. 고소함도 직선적이다. 면과 국물이 동시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드문 타입의 콩국수다.
밀밭정원
부석태 콩을 쓴 콩국수로 유명하다. 콩 자체의 풍미가 강한 품종이라, 맛이 또렷하다. 콩국은 부드럽고 과하지 않다. 처음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몇 입 먹다 보면 맛이 오히려 오래 남는다. 중간쯤에서 소금을 살짝 더하면, 고소함이 또렷하게 올라온다. 잘 삶아낸 면과 콩물이 조용하게 붙는다. 서로 경쟁하지 않고 같은 방향을 본다.
결국 어디를 가도 결론은 같다. 우리는 국수를 먹으러 가지만, 사실은 국물을 마신다. 그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모호함이 좋다.
국수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국물.
그 정도의 모순쯤은, 여름에는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