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6년 개근상의 의미

어릴 적 부모님은 개근상이 취업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걸 보는 회사는 없었지만, 그 말에는 한 시대가 믿었던 성실의 기준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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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6년 개근상의 의미

우리 어렸을 때 부모들은 기묘하게도 6년 개근상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초등학교 6년 개근. 말하자면 어린이 인생 최초의 장기 프로젝트였다. 비가 와도 가고, 감기가 와도 가고, 가끔은 정말 가기 싫어도 가야 했다. 

부모님은 말했다. “나중에 취업할 때 그런 거 다 본다.”

회사를 다섯 번 옮기는 동안 입사 지원서 어디에도 “초등학교 6년 개근 여부”를 적는 칸은 없었다. 면접관이 “혹시 초등학교 때 결석은 몇 번 하셨습니까?”라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 이력서에 6년 개근상을 적었다면 오히려 인사팀이 자랑할게 그렇게 없나 하고 실소를 했을거다. 뭐, 우리 부모만 그런게 아니다. 그 시절 많은 부모들은 다 그랬다. 왜였을까.

그건 당시의 이상적인 노동자상이다. 빠지지 않는 사람. 지각하지 않는 사람. 아프다고 쉽게 눕지 않는 사람. 하기 싫어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가는 사람. 조직이 만든 시간표 위에서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

사실 6년 개근상은 어른의 세계에서 원하는 사람을 어린이에게 미리 훈련시키는 기괴한 장치다. “이 아이는 성실합니다.” “이 아이는 참을 줄 압니다.” “이 아이는 공동체의 규칙을 잘 따릅니다.” 학교는 그렇게 말했고, 부모는 그 말을 사회가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다. 학교를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대단한 덕목이었을까. 아이가 아프면 쉬어야 하고, 너무 지치면 하루쯤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루 빠지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한 번 빠지면 두 번 빠지고, 두 번 빠지면 사람이 느슨해진다는 식의 낙인이 더해진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에 점심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삶. 공장과 회사와 학교가 비슷한 박자로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그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은 번뜩이는 사람이 아니라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단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더 안전한 인재로 보였다.

그래서 부모님 세대에게 6년 개근상은 취업 스펙이라기보다 생존 전략 같기도 하다. 세상은 결국 성실한 사람을 알아본다. 결석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 가서도 밥벌이를 한다. 몸이 조금 힘들어도 참고 나가는 사람이 조직에서 인정받는다. 그들은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아남았으니까.

우리 세대는 몸의 신호를 무시하는 법, 싫다는 감각을 누르는 법, 쉬고 싶다는 마음을 부끄러워하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웠다. “무리하지 마”보다 “조금만 참아”를 더 많이 들으며 자랐다. 6년 개근상은 그 말을 예쁘게 포장했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쉬는 일에 서툴다. 몸이 아파도 약을 먹고 출근하는 사람을 책임감 있다고 말한다. 번아웃이 와도 “요즘 안 힘든 사람이 어디있어”라는 말로 넘긴다. 하루 쉬면 내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내가 게으른 사람으로 판정될까 봐 불안해한다.

지금의 아이들은 더 이상 6년 개근상을 받기 위해 학교에 억지로 가지 않는다. 학교도 예전만큼 그 상을 강조하지 않는다. 아프면 쉬라고 말하고, 컨디션이 나쁘면 결석계를 내라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원하는 사람의 모양이 바뀌었다.

이제 회사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빠지지 않는 사람보다 잘 회복하는 사람이 더 오래 일한다. 참는 사람보다 자기 상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더 멀리 간다. 성실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성실의 정의가 다르다. 무너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기 전에 멈출 줄 아는 것. 그것이 지금 시대의 성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