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돌본다는 것

가족은 아름답다기보다 복잡하다. 사랑과 의무, 미안함과 피로, 다정함과 원망이 한집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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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돌본다는 것

병원 대기실이나 주민센터 복도에서는 종종 익숙한 장면을 목격한다. 휠체어를 밀고 온 자식, 접수창구 앞에서 이름을 되묻는 부모, 그 옆에서 약봉투와 감정을 함께 챙기는 사람. 한국 사회는 이런 풍경을 오래도록 하나의 미덕으로 삼았다. 효라고. 좋은 말이다. 다만 좋은 말은 자주 사람을 지치게도 한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너무 쉽게 빚의 언어로 바꾼다. 낳아주었으니 갚아야 하고, 키워주었으니 모셔야 한다고. 그러는 순간 사랑은 계산서가 되고, 돌봄은 상환이 된다. 그런데 성인이 된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늙은 부모 역시 다시 미성년자가 되지 않는다. 여든이든 아흔이든 성인은 성인이다. 이 단순한 사실 하나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정리해준다.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돌보는 것은 의무다. 자녀가 성인 부모를 돌보는 것은 의무가 아니다. 이 문장은 차갑게 들리지만, 꼭 냉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의무가 아닌데도 하는 일에만 마음이 남는다. 억지로 하는 효는 미담처럼 보여도 대개 생활에서는 피로와 원망으로 번역된다. 주말마다 가야 한다는 압박, 전화 한 통에도 생기는 죄책감, 병원비 앞에서 밀려오는 막막함. “부모님이니까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은 책임감처럼 들리지만, 실은 체념의 정중한 표현일 때가 많다.

문제는 이 부담을 아직도 개인의 양심으로만 풀려 한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자식이 많았고 부모는 비교적 일찍 늙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돌봄은 나눌 수 있었고 기간도 지금보다 짧았다. 지금은 자식은 하나 아니면 둘이고, 부모의 평균 수명은 90세에 가깝다. 그런데도 사회는 여전히 이 문제를 가족의 미덕으로 처리하려 한다. 국가가 맡아야 할 비용을 효라는 이름으로 집집마다 떠넘기는 셈이다. 효가 아름다운 이유도 있겠지만, 때로는 효가 싸게 먹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모 돌봄은 도덕보다 시스템의 문제다. 사랑만으로는 장기 돌봄을 감당할 수 없다. 몸이 불편하면 요양과 의료가 들어와야 하고, 더 어려워지면 시설과 공공 시스템이 받쳐줘야 한다. 가족이 차가워져서가 아니다. 사랑은 제도를 대신할 수 없고, 제도가 있어야 사랑도 덜 망가진다.

그렇다고 부모를 외면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는 이야기다. 못 하는 일을 억지로 끌어안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자는 것. 여기에는 생각보다 큰 해방감이 있다. 효를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자리로 돌려놓으면, 오히려 작은 다정함이 기쁨으로 다가온다. 한 번 더 전화하는 일, 병원 결과를 차분히 들어주는 일, 오늘은 못 가더라도 다음 주를 비워두는 일. 거창하지 않아서 오래 가는 것들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얼굴로 하느냐다. 괴로워하면서 하는 효는 부모를 짐으로 만들고 자식을 죄인으로 만든다. 둘 다 지친다. 반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하겠다는 태도는 관계를 덜 망친다. 못 가는 날엔 못 간다고 하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고, 나머지는 사회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냉정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가족을 덜 소모시키는 현실적인 애정이다.

가족은 늘 아름답다기보다 대체로 복잡하다. 사랑과 의무, 미안함과 피로가 한집에 산다. 그래서 더 선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때리지 않는 것, 빼앗지 않는 것, 모욕하지 않는 것.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멈추는 것. 그 위에 가능한 만큼의 선의를 얹는 것. 선은 권할 수는 있어도 강요할 수는 없다. 효도 아마 그 정도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