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라는 이름의 비효율
에스컬레이터 위의 한 줄은 늘 비어 있다. 우리는 그걸 배려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 배려가 기계를 더 빨리 닳게 하고, 사람들을 더 오래 기다리게 만든다면, 그건 여전히 배려일까.
서울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면 익숙하지만 어딘가 기묘한 상황을 목격한다. 가만히 서서 올라가는 사람, 앞사람 등을 보며 묵묵히 줄 맞추는 사람, 그리고 비어있는 한 줄로 성큼성큼 올라가는 성격 급한 사람. 신기한 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들 너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만 선다. 안내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다같이 약속이나 한 듯 다른 한 줄은 비워둔다. 급한 누군가를 위해서다. 그리고 그 급한 누군가는 늘 있다. 문제는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 풍경은 꽤 괜찮아 보인다. 한쪽은 서는 사람, 한쪽은 걷는 사람. 배려도 있고 질서도 있고, 뭔가 도시적인 예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기계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에스컬레이터는 양쪽에 사람이 비슷하게 올라타는 걸 전제로 움직이는데, 한쪽은 늘 서 있는 사람들로, 다른 한쪽은 성격 급한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계속 쓰이면 하중이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빨리 올라가는 것뿐이지만, 기계 입장에서는 맨날 한쪽 어깨에만 짐을 얹는 셈이다. 그러니 고장이 더 자주 난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가 지하철보다 상대적으로 덜 고장 나는 이유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쇼핑백을 들고 조용히 서 있을 뿐, 출근길처럼 숨차게 걸어 올라가지는 않으니까. 지하철 에스컬레이터가 백화점보다 싸구려라 자주 고장나는게 아니란 얘기다.
놀라운 사실은 한쪽을 비워두는 방식이 꼭 더 빠른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늘 “한쪽은 비워둬야 효율적이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런던 지하철 홀본역 실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 걷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서서 올라가고 싶다. 그런데도 예의상 한 줄로 몰려 서 있다 보니, 한쪽은 비고 다른 한쪽만 길게 막힌다. 그래서 양쪽에 다 서게 했더니 더 많은 사람이 더 빨리 이동했다. 줄은 짧아졌고 흐름은 훨씬 나아졌다. 더 빨리 가려고 비워둔 한 줄 때문에, 정작 전체는 더 느려진 셈이다.
그런데도 이 집단의 습관은 잘 안 바뀐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이건 이제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눈치와 배려의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 한쪽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통계적으로 틀린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뒤에서 누가 한 번 기척만 줘도 괜히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은 숫자보다 분위기에 더 약하다. 데이터보다 한숨 소리에 더 빨리 반응한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에스컬레이터에만 있는 게 아니다. 회사에서도 꼭 안 해도 될 회의를 하고, 아무도 다시 안 볼 문서를 만들고, 전혀 급하지 않은 일에 괜히 ‘긴급’ 딱지를 붙인다. 다들 속으로는 “이거 꼭 해야 하나” 싶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는다. 괜히 말했다가 예민한 사람, 협조 안 하는 사람, 분위기 깨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건 이런 비효율이 오래될수록 점점 예절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원래 하던 대로 하는 사람이 무난한 사람이 되고, “굳이?”라고 묻는 사람이 까다로운 사람이 된다.
그래서 집단의 습관은 개인의 습관보다 훨씬 질기다. 개인 습관은 혼자 마음먹으면 어느 정도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집단 습관은 나만 결심한다고 바뀌지 않는다. 혼자 양쪽에 떡하니 서 있으면 의식있는 시민이 아니라 그냥 길 막는 사람이 되기 쉽다. 결국 이런 변화에는 개인의 의지보다 다 같이 동시에 바뀌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류는 이상하게도 그런 일에 별 재능이 없다. 다 알고 있어도, 다들 먼저는 안 한다.
그러니까 에스컬레이터 한쪽 서기는 단순한 출근길 습관이 아니다. 이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비효율을 예의로 착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장면에 가깝다. 한 줄을 비워두는 동안 누군가는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고, 기계는 한쪽만 닳아간다. 우리는 더 빨리 가고 싶어서 그 줄을 비웠는데, 어쩌면 그 빈 줄 때문에 모두가 조금씩 더 느려진다. 이미 두 줄 서기가 효율적이란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래도 내일 아침이 되면 사람들은 또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설 것이 분명하다.
급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조금 더 빨리 망가뜨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