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안 찌는 사회
1991년, 미국 슈퍼볼 광고 시간에 레이 찰스가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한다. "당신은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You got the right one, baby — uh huh!)" 그의 뒤에는 날씬한 여성 댄서들이 줄지어 서서 화답한다. 광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다이어트 펩시(Diet Pepsi)였다.
그 시절 날씬함은 능력이었다. 자기 통제의 증거였고, 삶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훈장이었다. 반대로 뚱뚱함은 게으름의 징표였다. 먹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한 사람,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 사람에게 찍히는 낙인이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위고비(Wegovy)와 마운자로(Mounjaro)라는 이름의 주사제가 등장했다. 일주일에 한 번, 허벅지나 복부에 찌르는 이 약은 식욕을 조절하는 호르몬 GLP-1의 수용체에 작용한다. 임상시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체중의 15~20%가 줄었다. 다이어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효과였다. 그리고 이 약은 무언가 매우 불편한 진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었다.
비만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
GLP-1 계열 약물이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뇌에 "배가 부르다"는 신호를 더 강하게, 더 오래 보낸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고 싶은 충동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약을 복용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한다. "처음으로 음식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졌어요."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그동안 ‘의지력’이라고 불러온 것이 실제로는 쉬지 않고 작동하는 식욕과의 사투였다는 뜻이다. 날씬한 사람들은 원래 그 싸움을 덜 하도록 생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었고, 그것을 ‘자기 관리’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의지력은 어쩌면 능력이 아니라 타고난 운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것이 단순한 의학적 발견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수십 년간 비만인에게 쏟아진 도덕적 판결, 즉 "더 노력하면 되는데, 안 하는 것"이라는 시선이 최첨단 의학기술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우리는 사람을 그 사람 몸의 설계도가 아닌 외형으로만 쉽게 판단하고 낙인찍어왔던 것이다.
욕망이 사라진 자리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이야기가 너무 단순해진다. 약이 식욕 스위치를 꺼버린다는 것은, 동시에 인간 삶의 어떤 깊은 층위도 건드린다는 의미가 된다.
'먹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칼로리 섭취가 아니다.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 냄새, 첫 월급으로 사 먹은 소고기, 연인의 집에서 먹고 간 라면. 음식은 기억과 감정과 관계의 언어였다. 먹고 싶다는 욕망은 때로 살고 싶다는 욕망과 분리되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작은 황홀감, 그것은 삶의 즐거움을 구성하는 가장 일상적이고 평등한 형태였다.
GLP-1 약물을 투여한 일부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삶 전반에 대한 의욕도 옅어진다는 보고가 많다. 술에 대한 욕구도 줄고, 쇼핑 충동도 줄고, 전반적인 욕망의 볼륨이 낮아진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과학적으로 아직 명확히 규명되진 않았지만, 이 보고들은 약이 인간의 욕망을 조율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불교 철학에서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다. 그렇다면 욕망을 줄여주는 약은 일종의 해탈인가? 그러나 그 해탈이 수행이 아닌 제약회사의 주사기를 통해 온다면, 그것을 여전히 해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이어트 산업의 붕괴
경제적으로 접근하면 이 약은 ‘파괴적 혁신’이다. 전 세계 다이어트 산업의 규모는 수 백조 원에 달한다. 그런데 이 산업은 구조적으로 "결국 효과가 없어야" 유지된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더 이상 다이어트 제품을 살 이유가 없다. 실패가 곧 재구매 동기다. 요요는 사람 몸 뿐만 아니라 시장을 동시에 살찌운다.
위고비가 정말 효과적이라면, 이 구조가 무너진다. 헬스장, 다이어트 식품, 체중 관리 앱, 보조제, 대형 의류 브랜드의 플러스 사이즈 라인까지. 사회 곳곳에 조용하고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이미 미국에서는 패스트푸드 소비가 줄고, 항공사가 좌석 설계를 재검토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온다.
식품 산업에도 압력을 가한다. 지금까지 식품 기업들은 더 자극적이고, 더 달고, 더 짠 음식을 설계하며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를 교묘히 이용해왔다. GLP-1 약물의 등장은 애초에 살이 찌도록 설계된 음식들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새 삶을 시작할 기회를 준다.
그렇다면 비만의 원인은 개인의 나약함인가, 아니면 조작된 환경인가.
날씬함의 민주화인가, 새로운 계급의 탄생인가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서 가장 불편한 질문은 따로 있다.
누구나 이 약을 맞을 수 있는가?
우리나라 기준으로 비만주사제의 월 비용은 수십만 원에 달한다. 미국에서는 보험 없이 한 달에 1,300달러가 넘는다. 보험 적용 여부, 의료 접근성, 소득 수준에 따라 이 약은 누군가에게는 담뱃값 정도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아파트 월세가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날씬함이 '노력의 결과'에서 '부의 결과'로 이동한다. 낙인의 구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교해진다. "왜 약을 안 맞아?"라는 질문이 "왜 노력을 안 해?"를 대체한다. 빈곤이 비만의 원인이 될 때, 비만은 다시 빈곤의 증거가 된다. 몸은 여전히 계급의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이 약이 진정으로 보편화되어 누구나 접근 가능해진다면 어떨까. 날씬함이 희소성을 잃을 때,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모두가 날씬한 사회에서 미의 기준은 무엇으로 재편될까. 역사는 미의 기준이 항상 ‘가진 자’의 것임을 보여준다. 17세기 유럽에서 풍만함이 부의 상징이었다가, 산업화 이후 날씬함이 절제와 자기 관리의 상징이 된 것처럼.
절제의 역설
살 안 찌는 사회에서는 한 가지 기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절제가 미덕이던 사회에서, 약으로 얻은 절제는 과연 미덕으로 인정받는가.
운동으로 만든 근육과 스테로이드로 만든 근육을 우리는 다르게 평가한다. 명상으로 얻은 평온과 항불안제로 얻은 평온을 우리는 같은 결과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위고비로 얻은 날씬함과 절식으로 얻은 날씬함 사이에도 비슷한 위계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는 어리석은 편견일 수도 있지만, 인간이 미덕을 구성하는 방식과 깊이 연결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통 없이 얻은 것에 쉽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수행의 서사, 극복의 서사가 없는 날씬함은 칭찬받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약은 몸을 바꾸되 몸에 대한 시선은 바꾸지 못한다.
살 안 찌는 사회, 그 후…
결국 살 안 찌는 사회로 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몸을 인간의 가치와 연결 지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비만주사제는 몸을 바꾸는 약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몸에 대해 품어온 잘못된 믿음들을 폭로하는 뇌관에 가깝다. 날씬함에 도덕을 붙인 것은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였다. 의지력을 강요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자본이었다. 몸을 계급의 언어로 읽어온 것은 자연이 아니라 역사였다.
이 약이 널리 퍼질수록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 기술을 이용해 기존의 편견을 더 세련되게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을 계기로 그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을 것인가.
살 안 찌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그 사회가 진정으로 나아진 사회인지는 기술의 효능이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떻게 품느냐에 달려 있다. 주사기 하나가 수십 년간의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 아마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낙인이 얼마나 근거 없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는 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약의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