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대 4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대한민국 축구협회에는 선거가 있다. 그런데 선거가 있다고 민주적인 건 아니다. 독재 국가에도 선거는 있다. 대표팀의 성패는 온 국민이 함께 울고 웃는데, 그 팀을 둘러싼 결정은 192명이 내린다. 영향은 모두가 받고, 권한은 소수가 쥐고,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다.

0대 4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영국의 작은 도시 밀턴킨스의 스타디움 MK. 한국 축구에는 꽤 특별한 날이었다. 통산 1000번째 A매치였고, 북중미 월드컵을 석 달 앞둔 마지막 3월 점검이었다. 상대 코트디부아르는 FIFA 랭킹 37위로 한국(22위)보다 낮았다.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만날 남아공을 미리 대비하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초반은 나쁘지 않았다. 황희찬의 감아차기가 크로스바를 넘어갔고, 오현규의 왼발 슛이 골대를 맞고 나왔다. 그런데 경기 중간 수분 보충 휴식을 기점으로 흐름이 크게 바뀌었다. 코트디부아르 윙어들이 수비수 조유민을 손쉽게 제치며 연달아 슈팅 기회를 잡았고, 전반 35분과 추가시간에 연속으로 실점하며 0대2로 전반을 마쳤다. 후반엔 손흥민, 이강인까지 투입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이강인의 슈팅도 골대에 막혔고, 오히려 두 골을 더 내주며 최종 스코어 0대4. 경기 직후 김민재는 인터뷰 요청에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했다.

랭킹 15계단 아래 팀에게 4골을 허용했다. 1000번째 A매치의 결과가 0대4였다. 그리고 월드컵까지는 석 달이 남았다. 이 패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홍명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패배의 책임을 감독에게 묻는건 일종의 자연법칙과도 같다. 홍명보는 경기 전 직접 ‘빠른 수비 전환’과 ‘중원 조합’을 핵심 과제로 꼽았다. 그런데 경기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이 정확히 그 두 가지였다.

경기 시작 직후, 선수들이 앞으로 적극적으로 달려들며 상대 볼을 자주 끊어냈다. 하지만 코트디부아르가 금방 그 패턴을 읽어버렸다. 한국 수비가 앞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그 뒤 빈 공간으로 공을 길게 보내버린 것이다. 한 번, 두 번, 같은 방식으로 실점이 이어졌다. 상대가 이미 답을 찾았는데 한국은 같은 문제를 계속 냈다. 계획 A는 있었다. 하지만 계획 A가 안 통했을 때 꺼낼 계획 B는 보이지 않았다.

홍명보 체제에서 이 패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부임 이후 3백 수비 전술을 거의 모든 경기에 고집해왔다. 3백은 공격 시 측면을 넓게 쓸 수 있고 수비 시 중앙을 두텁게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 전술이 통하려면 측면 수비수들의 발 빠른 커버와 중원의 조직력이 전제돼야 한다. 문제는 상대가 그 구조의 약점, 즉 중앙과 측면 사이의 공간을 노리는 순간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코트디부아르전이 정확히 그 장면이었다. 상대에게 패턴을 읽혔는데도 수비 라인을 내리거나 포메이션을 바꾸는 조정 없이 같은 방식을 유지했다. 전술적 고집이 유연성을 완전히 잠식한 경기였다. 홍명보는 늘 그랬다. 10년 전에도 그래서 경질됐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홍명보 감독은 왜 많은 비판을 이겨내고 대한민국 축구대표 감독이 됐을까. 그를 그 자리에 앉힌 건 대한축구협회 정몽규 회장이다. 그리고 이 선임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납득하기 어려웠다.

전력강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박주호 해설위원이 직접 폭로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진지하게 협상이 진행된 외국인 감독 후보만 해도 제시 마시, 다비트 바그너, 거스 포옛 세 명이었다. 이 중 바그너와 포옛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까지 경험한 감독들이었다. 이들은 "손흥민과 이강인의 조합을 활용한 한국 축구의 미래"라는 주제로 프레젠테이션까지 직접 준비해 발표했다.

그런데 이 두 후보자와 달리 면접과 발표 절차 없이 홍명보가 선임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축구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박주호는 홍명보 내정 소식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영표, 박지성, 이동국 등 당대 최고의 축구 스타들도 잇달아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냈다.

심지어 이임생 기술이사가 오히려 홍명보를 찾아가서 협회의 축구 철학을 강의했다고 한다. 보통은 감독 후보가 자신의 비전을 협회에 설득하는 게 순서인데, 거꾸로였던 것이다. 정부 감사 결과 클린스만, 홍명보 두 감독의 선임 과정에서 총 27건의 위법·부당한 업무처리가 지적됐다.

바로 직전 감독인 클린스만 선임 과정이 더 황당했다. 클린스만은 2022 카타르 월드컵 현장에서 정몽규 회장에게 농담처럼 "코치를 찾고 계시죠?"라고 말했는데, 정 회장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선임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공식 절차가 시작되기도 전에 회장의 개인적 친분으로 감독이 사실상 낙점된 것이다. 클린스만은 부임 후 한국에 상주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아시안컵에서는 역대 최강 전력을 이끌고도 요르단에 져서 4강에서 탈락했다. 선수단 내 손흥민과 이강인의 충돌 사태까지 터지며 결국 경질됐다. 클린스만 감독은 5년 전 김판곤과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회가 구축했던 감독 선임 프로세스가 정몽규 회장에 의해 박살난 채 오로지 회장의 선택에 의해 뽑힌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잘못된 캐스팅을 보고 배우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클린스만이라는 전례가 있었는데도 홍명보 선임에서 같은 방식이 반복됐다는 것, 그게 정몽규 체제의 과오다.

한국 축구의 기득권들

그렇다면 정몽규는 왜 4번이나 회장이 됐을까. 클린스만 사태로 국정감사까지 불려 나가고, 홍명보 선임으로 여론이 바닥을 쳤는데도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화를 낸 사람과 표를 가진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다.

2025년 협회장 선거에서 정몽규는 유효투표 183표 중 156표, 득표율 85.7%로 4선에 성공했다. 밖에서는 "이래도 또?"였는데 안에서는 "그래도 또"가 우세했다. 선거인단은 192명으로 지역 협회장, 선수, 심판, 지도자 등 협회 내부 관계자들로 구성됐다. 팬은 표가 없다.

대표팀 유니폼은 온 국민이 입는데, 그 팀을 둘러싼 권력은 192명이 나눈다. 팬들은 열정의 주주지만, 제도의 주주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몽규 본인은 선거 공약으로 "선거인단을 400명으로 늘리고 팬과 스폰서를 포함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구조가 충분히 공정하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그런 약속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192명짜리 선거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오랫동안 한국 축구를 움직여온 원로들과 지역 협회장들, 이른바 '축구계 인맥'이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하고 유지해온 구조다.

이 구조의 문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2023년 승부조작 사면 파동이다. 그해 3월, 협회는 2011년 K리그를 뒤흔든 승부조작으로 영구 제명된 선수 48명을 포함해 축구인 100명을 전격 사면했다. 발표는 한국과 우루과이의 평가전 선발 라인업이 공개된 직후 기습적으로 나왔다. 경기에 관심이 쏠린 틈을 노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고, 축구계 안팎의 반발이 폭발하자 협회는 사흘 만에 사면을 철회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그 직후 부회장 이영표와 이동국, 사회공헌위원장 조원희가 동시에 사퇴를 발표했다. 이영표는 "이사회 통과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그런데 회의에서 사면 안건에 실제로 반대를 표한 사람은 조연상 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 단 한 명이었다는 취재 내용이 나왔다. 막지 못한 게 아니라,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막지 못했다"는 사과는 책임지는 것처럼 보이면서 핵심을 건너뛴 표현이었다.

더 씁쓸한 건 이들이 떠난 뒤의 풍경이다. 정작 사면 사태의 주동자로 지목된 황보관, 이임생 등 실세들은 아무런 입장 표명도 없이 자리를 유지했다. 얼굴이 알려진 스타 출신들이 먼저 사퇴하자 일각에선 "협회의 꼬리 자르기"라는 말이 나왔다. 조명이 비치는 자리에서는 책임지는 척하고, 실제 권력을 가진 자리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남아 있는 구조. 이게 한국 축구 기득권이 반복해온 방식이다.

홍명보 선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력강화위원장 정해성은 국내파 감독 선임이 좌절되자 결론도 나기 전에 사의를 표명하고 자리를 떴다. 책임이 필요한 자리엔 사람이 없고, 결정이 잘못됐을 때 그 결정을 한 사람은 흐지부지 사라진다. 그러면서 협회 내부의 실세들은 사건이 바뀌어도 얼굴이 바뀌지 않는다.

이 구조의 핵심은 이렇다. 한국 축구계에는 영예로운 자리를 마다하는 사람이 없다. 협회 부회장, 위원회 위원장, 각종 자문역. 이름이 붙고 사진이 찍히는 자리에는 경쟁이 생긴다. 반면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감독 선임처럼 결과에 따라 비판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자리, 내부의 잘못된 결정에 공개적으로 반대해야 하는 순간,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기득권과 정면으로 부딪혀야 하는 자리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권한은 나누고 싶어하지만 책임은 나누기 싫어하는 것, 그게 이 구조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다.

기득권은 어떻게 모든 걸 망치는가

기득권의 가장 큰 문제는 나쁜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오랫동안 그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 세계의 규칙으로 올라왔으니, 그 규칙대로라면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믿음이 틀렸을 때 아무도 그걸 고쳐줄 수 없다는 데 있다.

기득권 구조의 진짜 해악은 나쁜 결정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나쁜 결정이 나왔을 때 그걸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클린스만이 실패해도 같은 방식으로 홍명보가 선임되고, 승부조작범을 사면했다가 철회하는 촌극을 벌여도 실세들은 자리를 지킨다. 사건은 바뀌는데 구조는 그대로다. 이건 운이 나빠서가 아니다. 잘못된 결정에 대한 책임이 그 결정을 내린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설계된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다.

192명이 선출한 회장이 수천만 명의 팬을 대표하는 팀을 운영하는 것처럼, 기득권 구조는 언제나 대표성의 착시를 만들어낸다. 선거가 있다고 모든 것이 민주적이라 말할 수 없다. 세상에 선거가 없는 독재 국가는 거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서 그렇다.

진짜 민주주의는 누가 투표하느냐, 누가 후보가 될 수 있느냐, 그리고 선출된 사람이 어떻게 책임을 지느냐로 결정된다. 그 기준으로 보면 대한축구협회의 선거는 민주주의의 외형을 빌린 내부자들의 자치에 가깝다. 대표팀의 성패는 온 국민이 함께 울고 웃는데, 그 팀을 둘러싼 결정은 192명이 내린다. 영향은 모두가 받고, 권한은 소수가 쥐고,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다.

기득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비판이 아니다. 비판이 제도적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걸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비판받을 때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뻔뻔함이다. 한국 축구는 이 '불패의 전술'을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다.

Read more

행정의 밤

행정의 밤

금요일 밤이면 원래 사람들은 조금 그럴듯한 일을 한다. 술을 마시거나, 소개팅을 하거나, 적어도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며 이번 주를 위로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노트북과 충전기를 들고 약속 장소로 나간다. 그리고 거기 앉아서 카드 명세서를 확인하고, 병원 예약을 바꾸고, 밀린 메일에 답장을 보낸다. 이쯤 되면 취미라고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일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리델리 샌드위치 하우스

리델리 샌드위치 하우스

성북동에서 샌드위치를 전면에 내세운 가게를 본다는 건 생각보다 묘한 일이다. 샌드위치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편의점 냉장고에도 있고, 카페 진열대에도 있고, 프랜차이즈 메뉴판에도 있다. 점심이 애매할 때 가장 쉽게 손이 가는 음식이면서도, 이상하게도 누군가의 대표작처럼 다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너무 흔해서다. 너무 익숙해서다. 샌드위치는 늘 가까이에 있지만 좀처럼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